동물병원에서 수의사 혼자 진료 보고, 응대하고, 처치까지 다 챙기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건 테크니션한테 맡겨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막상 맡기려니 손이 멈춥니다. 채혈은? 주사는? 투약 설명은? 법적으로 걸릴지 안 걸릴지 확신이 안 서니 결국 원장이 다시 끌어안게 되죠. 위임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가 선인지 몰라서 못 맡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선은 원장님 개인의 감이나 동물병원마다 다른 관행이 아니라, 법에 이미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수의사법이 그어놓은 선
수의사법 제10조는 딱 한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수의사가 아니면 동물을 진료할 수 없다. 이 원칙을 어기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고, 문제는 이 책임이 실제로 처치를 한 직원뿐 아니라 지시한 원장에게도 돌아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원칙에 유일하게 예외를 둔 게 동물보건사 제도예요. 수의사법 제16조의5는 동물보건사는 동물병원 내에서 수의사의 지도 아래 동물의 간호 또는 진료 보조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어디까지인지는 시행규칙 제14조의7에 나와 있습니다.
| 구분 | 구체적 업무 |
|---|---|
| 간호 업무 | 동물 관찰, 체온·심박수 등 기초 검진자료 수집, 간호판단, 요양을 위한 간호 |
| 진료 보조 업무 | 약물 도포, 경구 투여, 마취·수술의 보조 등 수의사 지도 아래 수행하는 진료 보조 |
여기서 원장님들이 자주 놓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예외는 '동물보건사 자격을 가진 사람'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에요. 몇 년 일했으니 손에 익었다는 이유로 무자격 직원에게 같은 업무를 맡기면, 이건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됩니다. 물론 접수나 응대, 동물 붙잡아주기처럼 애초에 '진료행위'로 분류되지 않는 업무는 자격과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건 어디까지나 표에 있는 간호·진료 보조 영역을 무자격자에게 맡길 때예요.
채혈과 주사, 아직도 애매한 영역입니다
한 가지 더 짚을 게 있어요. 시행규칙에 적힌 업무 목록을 다시 보면, 채혈이나 주사는 명시적으로 들어 있지 않습니다. 업계와 학계에서는 동물보건사 업무 범위를 채혈·주사까지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지만, 아직 법으로 확정된 건 아니에요. 그러니 동물보건사 자격이 있다고 해서 '채혈 정도는 당연히 되겠지'라고 넘겨짚는 건 위험합니다.
무자격 테크니션이라면 얘기는 더 단순해집니다. 법의 예외 조항 자체가 적용되지 않으니, 채혈이나 주사를 시켰다가 무면허 진료행위로 판단될 여지가 있어요. 원장 입장에서는 그동안 문제없었다는 경험이 아니라, 애초에 법적으로 방어되지 않는 행위라는 점을 기준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실무에서 바로 써볼 수 있는 판단 기준
위임 여부는 결국 이 질문 세 개로 나눠서 보면 됩니다.
관찰하고 기록하고 붙잡아주는 수준이라면, 동물보건사든 무자격 테크니션이든 안전합니다. 경구 투약이나 약물 도포, 마취·수술 보조라면 동물보건사에게는 확실히 맡길 수 있지만 무자격 테크니션에게는 약간은 위험할 수 있는 영역이에요. 그리고 주사나 채혈처럼 침습이 들어가는 업무라면, 동물보건사가 하더라도 원장의 지도가 훨씬 촘촘해야 하기 때문에 아예 맡기지 않는 편이 안전해요.
'수의사의 지도 아래'라는 문구도 그냥 형식적인 말이 아닙니다. 원장이 옆에서 지시하고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구조를 뜻하는 거라서, 원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테크니션이 혼자 판단해서 처치하는 방식은 동물보건사 자격이 있어도 리스크가 남습니다.
위임을 줄이자는 게 아니라, 위임할 구조를 만들자는 것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게 있는데요. 이 기준이 '테크니션한테 아무것도 맡기지 마세요'라는 뜻은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에 가깝습니다. 뭘 맡길 수 있는지 명확히 알아야, 그제야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다는 얘기예요.
1인 원장 동물병원일수록 동물보건사 채용이나 기존 직원의 자격 취득을 지원하는 게 실질적인 운영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자격을 갖춘 인력에게는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확실히 맡기고, 원장은 진단·처방·침습적 처치처럼 수의사만 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하는 구조. 이게 잡히면 위임이 불안해서 원장 혼자 다 끌어안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줄어듭니다.
반대로 동물보건사 자격이 없는 인력에게는 관찰, 보정, 고객 응대, 사전 준비처럼 안전한 영역으로 역할을 명확히 나눠주는 게 직원 입장에서도 낫습니다. 눈치껏 알아서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 부담은 결국 테크니션 개인과 원장 모두에게 돌아오니까요.